기해동정己亥東征? 오에이노 가이코応永の外寇? 일본역사

언제인가, 역밸에서 일본어 위키, 이순신 항목때문에 한동안 말이 많았었는데요. 
얼마전 제가 일본어 위키, 츠지마노쿠니 항목을 읽다가, 대마도 정벌, 기해동정에 관한 이야기를 읽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일본어 위키 전문
 戦況は対馬側の反撃により膠着し、損害の大きくなった朝鮮側は対馬側の和平提案を受け入れ7月3日に巨済島へ全面撤退した。朝鮮側の被害は日本の資料では死傷者2500以上、『世宗実録』では6月29日の記録では死者百数十人、7月10日の記録では180人とされている。しかし総数の1%程度の被害で和平を受け入れるとは考えにくく、敗戦と自ら明記していることからも、実際の被害はもっと多かったと思われる。

번역기와 되도않은 사전으로 한 번역문

츠지마 측의 반격에 의해 피해를 입은 조선 측은 츠지마 측의 평화제안을 받아드려 7월 3일에 거제도로전면 철수했다. 조선 측 피해는 일본 측 자료에 의하면 사상자 2500이상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세종 실록 6월 29일 기록에 따르면 사망자 백 수십명, 7월 10일 기록에는 18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총수의 1% 피해만으로 평화를 받아 들였다고는 볼 수 없으며, 스스로 패전을 기록한 것으로 보아, 실제 피해는 더 많았다고 여겨진다.



흠, 위키 항목에서 나오는 표에서는 더욱 2500이라는 숫자를 강조해냅니다.


応永の外寇(己亥東征)
戦争:応永の外寇(己亥東征)
年月日:1419年6月20日-1419年7月3日
場所対馬
結果:対馬軍の勝利、朝鮮軍は撤退。
交戦勢力
So clan mon2.png 対馬国日本国李氏朝鮮
指揮官
So clan mon2.png 宗貞盛世宗
李従茂
戦力
800人17,285人
損害
20人戦死2,500人戦死

그저 학교에서 가르친 국사와 세계사 정도의 지식 밖에 지니지 못한 저로서는, 세종 재위 당시 상왕 태종이 계획했다고만, 대마도 정벌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기껏 이종무 라는 이름 밖에 기억하지 못하구요. 그런데 일본어 위키 항목에 따르자면, 한국 측은 정규군 1만명을 동원해 일본 지방정권을 공격했으나, 2000여명의 피해를 입고 도망갔다는 이야기가 되며, 일본 병사 한명을 죽이기 위해서 한국 병사 100명이 소모되었다는 이야기가 되네요. ㅡㅅㅡ;;; 아무리 과거라지만, 이건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원정간 한국 병사들은 허수아비들이었나. ㅡㅅㅡ;;;
같은 항목, 한국어 위키와 영어 위키는 조선 측 피해를 180명이라고 나오더군요. 그나마 이게 믿을만하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찾아본다고, 세종실록을 뒤졌으나, 뭔소린지 한개도 모르겠더군요.ㅡㅅㅡ;;;
역사 전공도 아닌데다가, 1차 사료 한번도 구경도 하지 못한 저로서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역시 왜곡인가요?

일본어 위키 기해동정 항목
http://ja.wikipedia.org/wiki/%E5%B7%B1%E4%BA%A5%E6%9D%B1%E5%BE%81


가모 사토이에蒲生郷舎? 가모 요리사토蒲生頼郷? 일본역사

  시험도 끝나고 MT도 끝났습니다만, 과제가 저를 향해 빙그레 웃더군요.ㅠ
한창 시게이에 반란에 대해서 쓰고는 있습니다만 귀찮습니다. ㅡㅅㅡ;;;




  과제하다 머리 좀 식힐려고 시바 료타로 선생의 세키가하라 5권을 펼쳤는데요. 마침 펼쳐진 부분이 이시다 미츠나리의 가로, 가모 사토이에의 최후의 장면이더군요. 



 

"오다 지주"
사토이에는 칼을 겨누며 말 위의 우라쿠사이를 불렀다. 오다 우라쿠사이, 나이는 쉰여덟이었다.
"이 얼굴을 본 적이 없소이까? 소인은 가모 히다노카미의 가신 요코야마 기나이올시다."
사토이에는 우라쿠사이가 알고 있을 법한 옛 이름을 댔다. 우라쿠사이는 말 위에서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아, 기억하고 있네, 여기서 나를 만난 것이 자네에겐 다행일세. 나이후에게 부탁해서 목숨을 건져주겠네. 나를 따라오게."
사토이에는 흙투성이 얼굴에 흰 이를 온통 드러내며 껄껄대고 웃었다.
"이런, 노부나가 공의 동생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어리석은 말씀을. 이제 와서 어르신께 자비를 구할 빗추로 보이시오?"
사토이에는 우라쿠사이 옆으로 달려가더니 오른쪽 허벅지를 가리개 채로 베었다.
우라쿠사이는 견디지 못하고 말에서 떨어졌다.
오다 가의 부하 사와이 히사조가 달려와 사토이에에게 창을 들이댔다.
사토이에는 칼로 그 창을 떨쳐내고 오히려 달려들어 히사조를 베어 넘어뜨렸다. 히사조의 하인 하나가 놀라 사토이에에게 달려들었지만 사토이에는 이를 뜯어내듯이 하며 땅 위에 팽개치더니 단칼에 찔러죽였다.
그러는 동안 근처에 있던 다른 가문의 무사들이 사태를 깨달았다. 몇 십 마리의 말들이 단박에 사토이에를 둘러써더니 한꺼번에 달려 우라쿠사이도 일어나서 사람들을 밀어내고 칼을 뽑아 들었다.
"다들 비켜라."
하지만 사토이에는 이미 숨이 끊겨 있었다.

시바료타로 저, 세키가하라 내용중 일부





  세키가하라를 처음 읽었을 때, 좋았던 부분이 긴고의 배신에 의해, 서군 측 무장들이 하나 둘 쓰러져 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정말 그 부분은 몇번이고 읽었는지도 모르겠네요. 각설하고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위 소설에서 쓰인 '가모 사토이에'라는 인물입니다. 원래 이름은 요코야마 기나이로 가모 우지사토 밑에서 활약했고, 가모 성을 받아 개명, 우지사토 사후 이시다 미츠나리를 섬겨 세키가하라에서 활약했다. 라고 소설에서는 설명하는데요. 그런데 '요코야마 기나이'와 '가모 사토이에'가 동일 인물이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그 설에 따르면 '요코야마 기나이'라는 인물. 지금까지 사토이에로 알려진 인물은 원래 남 고슈의 롯카쿠 씨를 섬기다, 롯카쿠 씨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멸망당하고, 가모 씨를 섬겼고, 우지사토 휘하에서 활약했다네요. 가신들은 아끼기로 유명했던 우지사토는 자기 성을 가신들에게 많이 뿌렸는데요. 기나이에게도, 큐슈 원정 이후, 가모 성과 鄕자를 하사합니다. 기나이는 그때 '가모 요리사토'로 개명합니다. 우지사토가 죽고나서, 가모 가가 야슈 우츠노미야로 전봉하게 되는데요. 그때 가모 가를 떠나 미츠나리를 섬기게 됩니다. 이게 소설에 나오는 '가모 사토이에' 입니다. '진짜 가모 사토이에'는 비슈 출신으로 본명은 사카바라 효에 라고 합니다. 시바타 카츠이에를 섬기다, 카츠이에가 죽고나서 가모 가로 이적(?)합니다. '진짜 사토이에'도 큐슈 원정 이후 우지사토한테서 가모 성과 鄕자를 같이 받는데요. 우지사토가 죽고, 우츠노미야 전봉 때 가모 가를 떠나 미츠나리를 섬긴 것도 요리사토랑 똑같습니다. 다만 요리사토와 사토이에의 결말은 다른데요. 요리사토는 소설상에 묘사된 것 처럼, 최후까지 저항하다 토사하고 '진짜 사토이에'는 세키가하라 이후에도 살아남아서, 가모 가로 복귀합니다. 그대로 잘 먹고 잘 살면 좋겠지만, 거기서 가모 가 내분으로 쫓겨나 토도 타카토라를 섬기기도 했었습니다. 후에 다시 복귀하지만, 또 쫓겨나고.ㅡㅅㅡ;;; 

  신장의 야망에서도 죽 요리사토는 사토이에로 나온 걸로 기억합니다. 그러다가, 혁신 몇 번째 패치 때부터 요리사토로 나오더군요. 이름도 비슷하고 여러가지 사건이 비슷한 시기에 있어서 인지, 둘을 구분 짓지 못해서, 거의 200년동안 한 사람은 다른 이름으로 한 사람은 다른 인물로 기억되었네요. 사실 별거 없는 내용이지만, 뭐랄까요. 그냥 싸한데요?ㅋ


사진자료 따위는 없어서, 그냥 천도의 요리사토 이미지를 올립니다.
사실 천하창세 때부터 계속 우려먹은 그림. ㅠㅠ 새로 그려줘.ㅠ

아이즈 전봉 후 우에스기 영토 우에스기

일단 시바타 시게이에의 반란 2는 시험과 MT가 끝나고 천천히 쓸려고 생각 중입니다.(세상에 시험기간 중에 MT 가는 학회는 우리 밖에 없을꺼야.ㅠㅅㅠ)그냥 심심해서 전봉 후의 우에스기 영토를 찾아보았는데요. 없더라구요. ㅡㅅㅡ;;; 그래서 이것저것 정보를 모아서 대충 그려보았습니다. 제대로 맞는지는 잘 몰라요. ㅡㅅㅡ;;; 워낙 날림이라.



우에스기 씨가 에치고 시절 때 석고가 55만석이었는데, 아이즈로 전봉되면서 석고가 120만석으로 2배 이상 늘어납니다. 그 구성을 살펴보면 사도노쿠니와 데와 쇼나이에다 다테 씨 구봉에 가모 씨 구봉을 더 해 120만석입니다. 여기서 사도와 쇼나이는 원래 영지였습니다. 현재의 지명으로보면 후쿠시마 현 대부분, 야마카타 현 절반, 사도 섬, 미야기 현 일부에 해당합니다. 일단 영지가 커져서 좋긴 한데 그냥 백지도에서 보면 붙어 있지만, 아래의 지형도를 보면 다 떨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요 지방들이 산맥에 의해서 따로 따로 떨어져 있어요. 쇼나이와 사도 같은 경우는 아예 본국과 이어져 있지도 않구요.

구글 맵에 본 지형도 입니다. 
아이즈 와카마츠, 고리야마, 니혼마츠, 요네자와, 츠루오카 등
대부분의 영지가 흩어져 있는 것을 볼 수있습니다.


더구나 1598년에 전봉하는데 세키가하라가 발생하기 불과 2년 전입니다.(저는 숫자를 못 외우는데 세키가하라는 잘 외웁니다. 1600년ㅡㅅㅡ;;;) 상황이라면 120만석이라고 하더라도 그 능력을 발휘 하기 어려웠지요. (이런 상황에서 그 유명한 나오에죠를 보낸 가네츠구의 담력에 새삼 감탄하게 됩니다. ㅡㅅㅡ;;;)게다가 북부에는 모가미 요시아키와 그 유명한 다테 마사무네. 마사무네 로서는 우에스기 령 대부분이 자기가 원래 얻었던 영지였던 만큼 우에스기에 대한 적대가 클 수 밖에 없었구요. 어쨌거나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집권하고나서는 아이즈, 쇼나이 등 대부분의 영지를 몰수 당하고 오키타마, 다테, 시노부 3군만 인정됩니다. 

지도로 그려보고나니까 에치고 랑 별 차이 안 나네요. ㅡㅅㅡ;;;

시바타 시게이에 新発田重家의 반란 1 우에스기

이런 잡담을 하게 된 건, 이 부분이 그다지 부각 되지 않아서 랄까요?
일본 전국시대 메이커 라고 할 수 있는 우에스기 가문에 대한 이미지는 의義로서, 혼란한 전국시대와 에도시대를 거쳐면서 의로운 가문. 이라고들 알려져 있는데요. 아닌게 아니라 히데요시 시대 이후부터는 그걸 의도적으로 부각시켜 '우리 존나 정의로움. 그래서 존나 강함. 그래서 우린 늬들하고는 좀 다름ㅋㅋㅋㅋ'이라는 이미지로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겐신이 '정의'로울지는 의문이지만요. 그런데 지금 제가 말하고자 하는 이 '시바타 시게이에의 반란'은 그런 우에스기 무적군단에 흠집 같은 이야기입니다. 겐신 사후에 호쿠리쿠 200여만석을 자랑했던 우에스기 씨가 어떻게 해서 요네자와 15만석으로 몰리는가? 그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시바타 가문의 문장이었던 미츠호시몬三つ星입니다.



오타테의 난
겐신이 급사한 이후 카게카츠와 카게토라의 후계자 다툼인 오타테의 난이 발생합니다. 당초 카게토라 측이 전황적인 측면(카게토라의 본가가 칸토의 패자 고 호조 이고  호조 가는 카이 타케다 가와 결혼동맹이었습니다.)과 정통적인 측면(카게카츠와 카게토라의 양조부에 해당하는 전 칸토칸레이 우에스기 노리마사의 경우 카게토라 측을 지지했으며. 오타테라는 지명 역시 카스가야마 성하촌에 있던 노리마사의 저택을 말하는 것입니다.)에서 모두 유리했었습니다만, 에치고의 국인영주들은 대부분 카게카츠를 지지했습니다. 카게카츠 같은 경우 국인영주 중에 하나였던 우에다 나가오 가 출신이었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시바타 가가 등장합니다. 시바타 가新発田는 우다 겐지宇多源氏의 하나 인 사사키 씨 지류로 칭하며 북 에치고에서 유력한 국인가문이었습니다. 시바타 가도 대세ㅡㅅㅡ;;; 따라 카게카츠를 지지합니다. 시바타 가 당주였던 시바타 나가아츠는 외교와 행정에 걸쳐 활약했으며 카이 타케다 씨와의 관계에서 평화교섭을 이끌어내는 등, 카게카츠 측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결국 이런 활약 속에 오타테의 난은 카게카츠가 승리합니다. 하지만 전후 보상에서 문제가 발생하는데요. 카게카츠가 자신을 지지해준 국인들은 보다 자신의 후다이들을 중심으로 보상을 내렸기 때문이지요. 
카게카츠로서는 사실 후다이를 챙기는 일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손익에 따라 적이 될지도 모르는 국인들보다는 자신을 믿고 따라준 후다이들을 중용하는 게 더 현명한 거지요.(여기서 히구치 가네츠구도 출세의 줄을 잡습니다.) 물론 국인들에게도 상급을 내리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카게카츠를 지지했던 국인들로서는 생각했던 것에는 한참 부족했던 겁니다. 국인들이야 실망이 클 수 밖에 없었고 에치고 내에서 소란으로 이어집니다. 심지어는 우에스기 씨 거성인 카스가야마 성에서도 칼부림이 일어나 유력중신이었던 나오에 노부츠나가 칼에 맞아 죽는 사태까지 발생합니다. (아시는 대로 나오에 가는 이후 히구치 가네츠구가 잇습니다.) 시바타 가로서도 나름 큰 전공을 세우기 까지 했는데 그 보상이 너무 적었으니 당연히 불만을 품었습니다. 이 와중에 당주 였던 나가아츠가 급사하고 그 동생인 시게이에가 가문을 잇게 됩니다. 카게카츠는 시게이에에게 가문을 잇게 해준 것으로 보상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시게이에로서는 그게 보상이 될 턱이 없겠지만요.

반란
오타테의 난은 끝났지만 일본 정세는 우에스기 가에게 아주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일단 내전기간 동안 에치고 외국의 영토를 대부분의 영토를 모두 상실했습니다. 호쿠리쿠 방면에서 확장을 계속 하고 있던 오다 군은 카가와 노토, 엣츄를 넘어 에치고 본국에 닿고 있었고, 코즈케 방면에서도 전통적인 적대관계 인 호조 군이 압박을 계속 해오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유일한 동맹국이었던 카이 타케다 가문이 멸망해버리자 신슈 방면으로도 오다 군의 압박이 들어오게되어, 삼면에서 포위 당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이 와중에 북 에치고와 연줄이 닿아 있던 아시나 모리우지는 불만에 차있던 시게이에에게 충동질합니다. 모리우지야, 에치고로의 확장을 노릴 좋은 기회였으니까요. 안그래도 빡가 있던 시게이에는 시바타 성을 점거하고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우에스기 가문으로서는 최악의 상황이 지속됩니다. 안그래도 세 방면에서 쳐들어 오는 적 으로 환장하게 만드는데 가에츠에서 시바타 가 독립하다니 이젠 4방면에서 압박을 당하면서 멸망이라는 단어가 눈 앞에 아른 거리기 시작했지요. 그 당시 카게카츠가 남긴 글에도 "아 씨바 우린 죽을지도 모름. 그래도 존나 싸울꺼임"이라는 글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한때 전국을 풍미했던 우에스기 가가 멸망위기에 처했습니다.

혼노지의 변
야구는 경기가 끝나기 전까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지요. 저도 그리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가끔은 말이 되지 않은 행운을 느끼곤 합니다. 노부나가라도 죽는 행운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멸망 위기에 처해있던 우에스기 가에게 그런 말도 안되는 행운이 발생합니다. 정말 노부나가가 죽어버린 것입니다. 아케치 미츠히데가 일으킨 혼노지의 변에 의해서 노부나가와 그 적자 노부타다가 죽자, 엣츄 방면과 신슈 방면으로 압박해오던 오다 군이 온데간데 사라져 버렸습니다. 우왕 굳ㅋ 우에스기 가는 위기를 넘긴 것입니다. 더구나 다행스럽게도 카게카츠와 그 가신들이 절대 무능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권력의 공백지가 된 신슈나 엣츄로의 무리한 확장보다는 일단 본국을 철저히 관리하여 어느정도 국력을 회복하는데 주력했습니다. 사실 확장시킬 힘이 없기도 했으려니와 본국 에치고 내에 적대 세력이 있으니 함부로 병력을 움직일 수도 없었지요. 시바타 카츠이에와 대립하고 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엣츄 방면으로 카츠이에를 압박해줄 것을 요구하고 그에 따르면 엣츄와 노토 2국을 주겠다. 라는 약속을 하지만, 안 그래도 힘도 없는데다가 가에츠에 웅크리고 있던 시게이에 때문에 카게카츠는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2로 이어짐

우에스기 젠슈의 난 上杉禅秀の乱 우에스기

 정말 오랜만입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니 정신이 없네요. 날이 좀 쌀쌀해졌고 벌써 중간고사ㅠㅠ 전공이 전공(문예창작과 입니다.)인지라 개강하자마자 넘쳐나는 과제들ㅠ, 그리고 글에 대한 압박감. (도대체 데리다는 뭐하는 놈이고 바르트는 뭐하는 사람이냐!ㅠ)그거 땜빵때운다고 정신이 없어서 블로그 관리를 못했습니다. 포스트를 쓸려고 하다가 맨날 까먹네요. 오늘은 제대로 한번 짧게라도 적어볼랍니다. 이번 쓸려는 것은 우에스기 젠슈의 난 입니다. 아, 기다리시는 분은 없군요. ㅡㅅㅡ;;;  


 칸토칸레이 라는 직은 카마쿠라 부가 만들어지면서 칸토 장군을 보좌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직책인데요. 처음에는 시츠시執事 라고 불렸습니다. 한국어로 집사이지요. 무로마치의 쇼군을 보좌하는 직책도 시츠시 였으므로 칸토시츠시 라고 불렸습니다. 후에 무로마치의 시츠시가 칸레이管領로 변경됨에 따라 칸토시츠시 역시 칸토칸레이로 변경됩니다. 원래는 정원이 2명이었고, 우에스기 가 뿐만 아니라, 코우 씨, 하타케야마 씨, 시바 씨들도 칸레이를 역임했습니다만, 나중에는 우에스기 가만 독점적으로 세습하게 되고, 야마노우치 가와 이누카게 가에서 번갈아 가며 역임하게 됩니다. 
 우에스기 가의 종가 취급을 받던 야마노우치 가에서 칸레이가 주로 배출됩니다. 여기서 16대 칸토칸레이 우에스기 노리사다가 등장합니다. 노리사다는 아시카가 미츠카네와 모치우지를 보좌했습니다. 문제는 바쿠후와 쿠보 간의 대립이었는데요. 칸토를 통제하고 싶어하는 바쿠후와 칸토에서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싶어하던 쿠보 간의 대립이었는데요. 노리사다 그 대립에 노이로제라도 걸렸는지 병이 나버립니다. 결국 칸토칸레이를 사임하고 이누카게 가의 우에스기 우지노리가 17대 칸토칸레이로 취임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에스기 우지노리. 우지노리가 바로 '우에스기 젠슈' 입니다. 젠슈는 우지노리의 법명입니다.
 우지노리는 칸토의 유력한 무장 중 하나였는데요, 동쪽에서 쳐들어온 다테 마사무네(전국말 독안룡 아님)가를 격퇴하기도 했었습니다. 입지가 약했던 이누카게 가의 우지노리가 칸레이에 취임하자, 자신의 자리를 강화시키기 위해, 모치우지의 동생 아시카가 모치나카와 모치우지의 숙부이자 모치나카의 양부 아시카가 미츠다카와 친분을 쌓아갑니다. 물론 모치우지로서는 자신의 자리를 노릴 가능성이 있는 친족들과 친하게 지내는 우지노리를 좋게 볼 수 없었지요. 결국 모치우지는 우지노리를 멀리 했고, 정적 노리사다의 아들 우에스기 노리모토를 더 중용하게 됩니다. 결국 가신의 예의없음을 이유삼아 우지노리의 영지를 모치우지가 일부 몰수 하자, 우지노리는 항의하면서, 칸레이직을 사임하게 됩니다. 당연히 모치우지는 옳다꾸나 하면서 칸레이에 노리모토를 앉혀버립니다. 끓어오는 화를 참지 못한 우지노리는 친하게 지내던 미츠다카와 모치나카에다가, 이와마츠 미츠즈미, 타케다 노부미츠(카이 겐지. 그 타케다), 나가오 우지하루, 치바 씨, 미우라 씨를 끌여들여서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게 바로 우에스기 젠슈의 난입니다.
 우지노리 측은 소슈 카마쿠라 부를 제압하나, 위험을 느낀 모치우지는 이미 탈출한 뒤였습니다. 탈출한 모치우지는 슨슈 이마가와 노리마사에게 의탁합니다. 사태의 급박함을 파악한 바쿠후는 신속하게 모치우지를 지원하기로 결정하고, 이에 따라 이마가와 씨, 우츠노미야 씨, 사타케 씨, 에치고 우에스기 씨에게 우지노리 토벌을 명령합니다. 우지노리도 슨슈를 향해 반격하지만 이마가와 노리마사에 패하고. 그 때문에 칸토 무사들의 지지를 잃게 됩니다. 무사시의 에도 씨와 토시마시 씨가 연합해서 우지노리를 공격해 싸워 이기지만 그 사이에 이마가와 씨가 소슈로 침입하고, 결국 미츠다카, 모치나카, 우지노리는 츠루가오카 하치만 궁 유키노시타에서 자결하게 됩니다. 타케다 노부미츠는 본국인 코슈로 피할 수 있었으나 결국 추격군이 쫓아와 토쿠사 산에서 자결합니다. 여담이지만 후에 타케다 가의 마지막 당주 카츠요리가 덴모쿠 산에서 자살하는데, 덴모쿠 산의 옛날이름이 토쿠사 산이라고 합니다. 결국 같은데서 자살. 뭐랄까 신기하네요. 어쨌든 주모자가 거의 자결하고 이와마츠 미츠즈미를 참수하자, 우에스기 젠슈의 난은 종료되고, 이누카게 가는 사실상 멸망합니다. 
 사실 바쿠후 측도 카마쿠라 쿠보를 예쁘게 봐서 도와준 것은 아니었고, 여전히 간섭하고자 하는 무로마치와 어떻게든 자립하고 싶은 카마쿠라 간에 대립도 해소되지 않았고, 명령을 담당하는 쿠보와 실무를 담당하는 칸토칸레이 간의 대립이 이어졌습니다. 오히려 더 극심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후 오에이의 란, 에이쿄의 난, 유키 전투, 쿄토쿠의 난으로 이어져 칸토는 사실상 전국기에 돌입하게 됩니다.  

 사실 오래전 부터 계획했던 거지만 막상 하니 귀찮네요. ㅡㅅㅡ;;; 사진 자료는 없습니다.ㅎ

1 2 3